'금융사기'에 해당하는 글 1건

이야기의 발단

낮에 조금 황당하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 일을 겪었다.


점심먹고 조금 나른한 시각. 서버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던 나는 황급히 눈을 떠서 회의실로 향했다.


유럽으로 출장을 가시면서도 우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공학도가 되기를 바라시는 교수님께서 논문 리뷰 퀘스트를 내주신 덕분에 오늘 관련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나는 맡은 논문이 없어서 잠깐 들으면서 고개 끄덕거리다 모르는 부분 나오면 멍때리다 하는 중이었지만.


커피는 챙겨갔어도 아직 잠이 덜 깬 시점이라 더 크게 낚여서 퍼덕퍼덕거렸던 것 같다.

입질이 온다~

논문 미팅 들으면서 멍때리던 와중에 전화 한통이 걸려와서 냉큼 받았다. 평소같았으면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혹시 택배기사님일까봐 010으로 시작하는 거 아니면 안받았는데 오늘따라 왜그랬을까. 전화받고 여보세요 인사를 하니 어디 검찰청에서 전화를 하셨단다.


그래서 듣고있자니 내 명의로 대포통장이 두 건이 개설이 되었는데, 그게 불법도박 사이트랑 연루되어서 극비리에 수사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내가 켕기는(?)게 없었으면 어휴 보이스피싱 ^오^ 하면서 바로 끊었을텐데 작년쯤엔가 지갑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어가지고 홀라당 걸려들고야 말았다. 진짜로 내 신분증 복사해서 뭔 짓을 저질렀나 싶어가지고. 게다가 잘못되면 명의도용 피해자가 아니라 사건 용의자로서 조사가 들어간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 소심한 나는 더 쫄아붙었다.. ㅜㅜ


게다가 그쪽에서 내 개인정보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전화번호, 이름, 주민등록번호, ... 싸게 팔리고 있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당하고나니 뭔가 굉장히 괘씸하구만) 나름대로 구체적인 상황설명까지 듣고있자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나중에는 진짜 확인해봐야 되나 싶어서 은행에 가서 물어보려고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결국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 이거 보이스피싱이네 ㅡㅡ 라는 결론이 나와버려서 은행은 됐고 나간김에 산책이나 하고 왔지만.

사기꾼 걸러내기

나쁜 낚시꾼들이 말한 시나리오 중에서 의심할만한 포인트 몇 가지가 있다.


  1. (이건 검색 해보고서야 알았다) 정부기관은 유선전화로 개인정보가 맞는지 틀린지 확인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이거이거 맞습니까? 이런 식으로 확인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나한텐 그렇게 물어봤다. 망할놈들. 주민등록번호는 어디서 얼마주고 샀냐고 물어보고싶다.

  2. 뭐 사건번호 확인시켜준답시고 요상한 피싱사이트 접속하게 시키는데, 정부기관 웹사이트의 도메인은 무조건 .go.kr 로 끝난다.
    아무리 그럴싸해보여도 .go.kr로 끝나지 않으면 아휴 오늘도 낚시하시느라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하고 전화 끊으면 된다. 아무리 이전화 마음대로 끊으시면 피해자가 아니라 용의자로 수사하니 뭐니 해도 그냥 하하하 농담도 재미있게 잘하시네요~ 라고 대답하도록 하자.

    2-1. 특히 그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사이트맵이라든지, 언어 설정 변경이라든지 그런거 꼭 눌러보기 바란다.
    피싱사이트는 낚시하는 데 필요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사이트맵이 작동을 안하거나, 언어 설정을 변경하면 (예를들면 영어로) 모방 대상인 원래 홈페이지 (도메인이 .go.kr로 끝나는 진짜 정부기관)로 접속이 된다. 거기서 다시 언어설정을 우리말로 바꾸면 피싱사이트가 다시 뜨지 않는다.
    뭐 그것마저 교묘하게 만들었으면 정성에 탄복하여 돈을 내줄만도 하....긴 개뿔! 그런 잔머리 돌릴 시간에 정당하게 돈을 벌어라 사기꾼들아!

    2-2. 사기꾼들도 세상에는 나같은 호구만 있는 건 아닌 줄 아는 모양인지, 이런 사이트 들어갈 때는 보안상의 문제 운운하면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확인하라고 시킨다.
    돌아가는 모양새 보고서 어 이거 보이스피싱이네! 라면서 훈수둬 줄 고마우신 분들로부터 격리하려는 음흉한 수작이다.

  3. 은행 직원들까지도 연루되었을 수도 있는 아아주 거ㅓㅓㅓㅓ대한 사건이기 때문에 절대 은행가서 직원들한테 물어보지 말고 이체업무 볼 때는 전화연결은 끊지 말고 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하라고 한다.
    이게 바로 ATM 기계에서 '혹시 누군가의 지시로 이체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어보는 바로 그 상황이구나! CCTV 돌렸을 때 누가봐도 나혼자 가서 이체하는 걸로 보이도록 꾸미는 수작질이다.

  4. 이게 그냥 결정적인 건데, 전화번호 그냥 네이버 같은 데다가 한 번 쳐보면 된다. 나한테 걸려온 전화번호도(02-6949-0092)도 스팸번호라더라 ㅎㅎ 어이구 이사람들아....
    이 뒤부터는 그냥 여유롭게 아 네네 하면서 근데 정부기관인데 도메인이 .com으로 끝나요? 라고 물어보면서 뭐라고 변명하나 들어줬다.
    (저때는 내가 참 멍청했다. 인정. ㅎㅎ 정부기관에서 .com으로 끝날리가 없는데 맨 처음 저 시점에서 이미 눈치챘어야 했다. 용의자 피해자 얘기에 정신이 팔려가지고..)

  5. 여기서는 참 앞서의 그 교묘한 시나리오들이 무색하게 너무 티가 나서 참 허탈해졌는데, 안전계좌랍시고 돈을 옮기라는 계좌가 개인명의다. 거참.
    저 계좌번호야말로 대포통장이려나?

마무리

내가 열심히 전화통화 들어주느라고 날려먹은 시간과 더운데 밖에 나가서 산책하느라 피부가 상했긴 하겠지만, 놈들도 나랑 전화하느라 전화비 나갔을테니 쌤쌤으로 봐준다. 저렇게나 많은 수상쩍은 점들이 널려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다음 번에 누가 낚시질을 시도할 때는 덜 호구짓 할 수 있겠지.

게다가 나중에 전화를 끊어버리니까 다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는지 열번 가까이 다시 전화걸더라. 죄다 통화 거절행 :) 어구구 수고하셔쓰요...


평상시 호구처럼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덥석덥석 돈 부쳐줄 정도로 답없는 호구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하하.


이렇게 글을 쓰면 나의 멍청함을 자랑하는 꼴이 되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사기꾼들에게서 구해낼 수 있다면 (또다시 낚시 전화를 받을 미래의 나 포함..)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일상 >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GoodNotes 3 사용자를 위한 백업 가이드  (2) 2014.10.23
doxygen  (0) 2014.07.08
나의 보이스피싱 체험기 (부제: 나는 호구다)  (0) 2014.07.05
Day One 무료!  (0) 2014.07.04
제주도 마지막날  (0) 2014.06.29
제주도 둘째날  (0) 2014.06.29

WRITTEN BY
Chaz
서울소재 모 대학교 공대 졸업하고 일개미가 된 일명 비둘기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